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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크업/한국 메이크업의 역사

한국 메이크업의 역사

by sol솔- 2024.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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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화장의 역사



1. 고조선시대

한국인들은 일찍이 백색 피부를 호상이라 선호하였고 미남 • 미녀를 존숭 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아름다움과 청결을 중요시 여겼다. 한국인의 화장은 엷은 색조에 은은한 화장으로, 타고난 아름다움을 가꾸는데 미용의 주안을 두었다. 전혀 딴판으로 변형시키는 것을 야용이라 경멸하였으며, 깨끗하고 맑은 피부만으로도 훌륭한 미용이라 생각하였다.

단군신화에 의하면 환웅이 곰과 호랑이에게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고 쑥과 마늘을 먹게 하였다. 쑥과 마늘은 민간에서 널리 행해진 미용 처방으로 쑥을 달인 물에 목욕을 하고 마늘을 찧어 꿀과 함께 얼굴에 바르면 기미, 주근깨, 잡티 제거와 미백에 상당한 효과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며 햇빛을 보지 않으면 흰 피부를 가질 수 있으므로 그 당시 여성들의 미의 기준은 흰 피부를 유지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기록에 의하면 만주 지방의 요루인들은 돼지기름을 피부에 발라 추위를 이기고 동상을 예방하였다. 또한 돼지기름은 햇빛, 눈으로부터 그을림을 예방하고 피부를 희고 부드럽게 하는 성분이 있으므로 유럽인들도 피부 마사지에 이를 사용하였다. 또한 말갈족은 오줌으로 세수하여 얼굴에 미백효과를 얻었으며, 낙랑 시대의 유물 중 채화칠협에 나타난 인물상을 보면 머리가 정돈되어 있고 이마를 넓히기 위해 머리털을 뽑은 흔적이 뚜렷하고 눈썹이 굵고 진하게 그려져 있다. 이와 같이 여러 사례를 볼 때 한반도와 한반도 주변 거주민들은 피부보호와 피부미용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고 추측할 수 있다.



2. 삼국시대

고구려

고구려 사람들은 남•여 모두 깨끗한 옷을 입기를 좋아하였으며 밤이면 남 • 여가 여럿이 모여 배우 놀이와 음악을 즐겼다. 신분과 직업에 따라 각기 달리 치장했으며 삼국사기에는 무녀와 악공이 연지 화장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서기 5~6세기경 수산리 고분벽화 귀부인상을 보면 머리에 관을 쓰고 있고 뺨과 입술이 연지로 단장되어 있다. 쌍용총 고분벽화의 여인상도 의관 혹은 시녀로 보이는데 얼굴에 뺨과 입술에 연지로 동그랗게 화장되어 있다.

 

백제

백제 사람의 화장품과 화장술에 대해 구체적인 내용을 밝힌 기록은 거의 없다.

중국 문헌이 의하면 백제인들의 화장은 신분 무주(분은 바르되 연지는 바르지 않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엎고 은은하고 세련된 화장을 즐겼음을 알 수 있다. 일본 옛 문헌을 보면 일본인은 화장품도 만들 줄 모르고 화장술도 몰랐으나 백제로부터 화장품 제조 기술과 화장 기술을 익혀 비로소 화장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백제의 화장 문화는 일본에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신라시대에는 영육일치 사상 (아름다운 육체에 아름다운 정신이 깃든다)의 영향으로 남•여 모두가 자신의 외모와 미에 관심이 높았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는 아름다운 남자였으며 그의 왕비는 빼어난 미녀였다. 알에서 깨어난 박혁거세를 동천에서 목욕을 시켰더니 몸에서 광채가 났고 왕후는 몸매와 얼굴이 남달리 아름다웠지만, 입술이 닭 주둥이 같은 결점이 있어 북청에서 목욕을 시켰더니 완전한 미인이 되었다고 한다. 두 사람의 목욕 일화는 한국인이 어느 민족보다도 일찍이 아름다움을 숭상하고 추구하였음을 증명하여 주고 있다.

불교의 전래는 화장과 화장품의 발달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목욕재계와 향사용 등이 대표적이다. 신라에서는 일찍이 백분과 같은 화장품이 제조되었고 화장이 행해졌다. 일본 고문헌에 의하면, 신라의 승려가(서기 622년) 일본에서 연분을 만들었기에 상을 준 기록이 있다. 팥, 녹두를 가루로 내어 세제로 사용하였으며 콩입나 팥의 냄새를 제거하기 위하여 향료를 사용하였다. 머리 손질은 동백이나 아주 기술용으로 하였고, 얼굴에는 분꽃씨 가루나 활석 가루 등으로 분을 만들어 물에 개어 발랐으며, 눈썹은 나무 재를 물에 섞어서 그렸다.



고려시대

고려의 태조 왕건은 신라의 정치제도와 문화 전통을 계승하는 정책으로 화장술과 화장품 제조 또한 전승 • 발전되었다. 그 결과 화장은 외형상 사치스러워지고, 내면으로는 탐미주의 색채가 농후해졌다. 고려시대에는 화장이 이원화 되었는데 여성의 신분과 직업에 따라 분대 화장(짙은 화장)과 비분대화장(옅은 화장)으로 나누어진다. 분대 화장은 기생 중심의 화장으로 분을 도포한 듯이 하얗게 많이 바르고 눈썹을 가늘게 다듬어 또렷하게 그렸으며 머릿기름은 반질거릴 정도로 많이 바르는 것이 특징이다. 고려 초기에 교방에서 기생을 훈련하고 분대 화장법도 교육함으로써, 분대 화장은 기생의 상징이며 진하고 야 한 화장을 분대라고 지칭하게 되었다. 비분대화장은 여염집(비 직업) 여성들이 기생으로 오해받지 않으려고 분대 화장을 기피하였는데 서긍의 고려도경에 고려 귀부인의 화장에 대하여 "향유를 바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분을 바르되 연지는 바르지 않았다. 눈썹은 넓게 그리고 비단향낭을 패용했다"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기녀들의 세련되고 짙은 화장에 비해 귀부인들은 은은하고 우아한 멋을 내는 자연스럽고 기생과 대조되는 화장을 즐겼다.



조선시대

조선시대는 유교적 도덕관념과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상으로 고려시대의 사치와 퇴폐풍조에 대한 반작용으로 화장에 대해 이 차례 금령을 내린 바 있다. 분대 화장을 기피하고 한국인의 고유 미의식인 신체가 청결해야 마음도 청결하다는 사상 즉, 내면의 미와 외면의 미가 동일하다는 사상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화장품 생산이 위축되거나 화장에 소홀했던 것은 아니며, 오히려 화장 개념의 세분화가 촉진되어 갔다.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삶을 강요받았던 조선 시대 여성들에게 있어서 화장의 필요성이 점차 상실되어 자신의 아내 혹은 며느리로서의 여성 상에 대해서는 얼굴은 둥글고, 통통하며. 삼빛은 흰 편이고. 흉터나 잡티가 없다. 전체적인 골격의 이상형은 건강하고 머리 순이 많고 검으며, 인중은 길고 입술 색은 붉은빛을 띠어야 아들을 잘 낳고, 인내심이 강하고 원만한 성격의 소유자'라 여겼다.

따라서 그 당시 여집(일반 가정) 여성들의 화장은 아들 잘 낳는 모습으로서의 기능을 위한 것으로 사용되었으며, 점차 결혼, 외출의 의식 행위로 그 개념이 바뀌어 갔다. 그러나 그 시대 남성들이 이상적으로 삼았던 미인의 모습은 부덕한 모습으로서의 여성이 아니라, 앵두처럼 붉고 작은 입술, 초승달 같이 흐리고 가느다란 눈썹에 쌍꺼풀 없이 가느다란 눈, 마늘쪽처럼 생긴 자그마한 콧방울, 반듯하고 넓은 이마, 턱이 다소곳하게 작고, 동그랗고 아담한 계란형 얼굴의 전통 미인 모습은 한국 회화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 초상으로 평가되는 조선 후 기 화가 신윤복의 '미인도'에 잘 나타나 있다. 즉 정실부인으로서의 여성에게는 부계혈통 보존을 위해서 화장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강요한 반면, 그들의 유희 대상으로서의 기생 신분의 여성들에게 있어서는 분대 화장이 허용됨으로써, 가부장제하에서의 이중적인 성윤리관이 화장 문화의 형성에도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 당시 미인박명사상이 문화적 관념으로 자리 잡음으로써, 미인이나 화장과 같은 외모 가꾸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의 형성에 한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미용법도 발달하여 조선시대 《규합총서》에는 겨울에 얼굴이 거칠어지고 터지는데 달걀 세개를 술에 담가 봉하여 네 이레 두었다가 바르면 얼굴이 지 않고 옥같아진다' 라는 미용법이 수록되어 있고 이 밖에 여러 가지 두발의 형태, 입술 그리는 방법, 눈썹 그리는 방법 등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 직 후인 선조 (1567~ 1608) 때 일본에서 발매한 아사노 쓰유 라는 화장수 광고 문안 가운데 조선의 최신제법으로 제조한 이라는 구절이 있는 것을 보면, 조선시대 중기까지 화장품 제조기술이 발달하여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수공업 수준을 탈피하지 못하고, 늦은 산업화로 외국의 화장품 기술력에 비해 뒤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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